게임 이야기

[후기] The Case of the Golden Idol "황금 우상 사건" 한패후기

오고루 2023. 2. 26. 00:28

!! 스포주의 !!

 

추리라는 게임 장르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마이너에 머물러 왔다.

두뇌 풀가동을 하며 뇌를 쫄깃쫄깃(?)하게 하는 퍼즐이나 추리류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저 아쉬울 뿐이다.

특히 완성도 높은 국내산 추리게임은 씨가 마른 수준이며 대부분 해외에서 만들어진 게임들을 수입해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시간의 딜레마를 재밌게 플레이하고 추리게임 마렵네.. 하면서 플레이 한 것이 Who's Lila? 였는데 물론 그 게임도 재미있었지만 결말이 모호하게 끝났기 때문에 좀 더 간결하게 끝나는 추리게임을 갈망했다.

 

그러던 와중 찾은 것이 황금 우상 사건이었고 내 안의 추리 게임 1황인 오브라딘의 개발자 루카스 포프가 극찬했다는 것을 접하자마자 할인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즉시구매했다.

예상대로 게임은 아주아주 재미있었고 한가지 결론을 도출하는데 정해진 루트가 아닌 자신만의 단서와 추리를 조합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초반에 에드먼드의 이름을 맞출때 나는 편지에 적인 수신인을 보고 맞추었으나, 내 지인은 에드먼드의 소지품에 적힌 E.C 라는 글씨를 보고 단박에 맞추었다.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가진 손수건, 잠옷, 슬리퍼, 일기장 등 모든 소지품에는 이니셜이 적혀있었다... 이 단서를 눈치챈다면 진상에 꽤 빨리 도달할 수도 있지만 딱히 모른다고해서 게임내에서 큰 낭패를 보는 것도 아니니 여러방면에서 자유롭게 자신만의 추측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리게임으로써는 정말 높은 점수를 주고싶다.

 

그러나.. 거듭 적는 것이지만 난 영어를 못한다 ㅎ...

의사의 응접실 살인사건 스테이지에서는 요약문장 대부분에 슬롯구멍이 뚫려있었고 복잡한 진술서 글들을 보자 그만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일단 게임을 껐다...

그 전 챕터까지는 너무나 재미있게 플레이 했기때문에 한패를 진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나머지 챕터들은 작업을 진행한 후에 다시 플레이 해보기로 하고 바로 클라 뜯기에 돌입했다.

 

 

고도가 뭐여

 

지금까지 작업한 한패 게임들은 모두 유니티로 만들어진 게임이었다.

유니티는 가장 대중화된 게임엔진중 하나이고 한글패치를 위한 정보들도 굉장히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이 게임은 고도 엔진(godot)이라는 아주 마이너한 엔진으로 만들어졌고 현지화는 커녕 클라뜯는 방법에 대한 정보가 국내에는 전혀없었다.

이부분이 살짝 막막했지만 해외 포럼에서 열심히 검색을 해서 겨우겨우 현지화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정보들은 블로그에 남겨둘 예정이니 고도엔진 현지화 하고자하는 니즈가 있는 사람은 참고해보면 좋을 듯 하다.

https://ohgoru.tistory.com/15

 

고도엔진(Godot Engine)기반 게임 한글화 강좌

들어가기 전에.. 게임 엔진이라고 하면 흔히 언리얼 엔진이나 유니티를 떠올린다. 이번에 소개할 엔진은 고도엔진(Godot Engine)으로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은근히(?) 전해지고

ohgoru.tistory.com

 

파일은 어찌어찌 뜯었다... 이제는 대사집을 찾을 차례...

대충 파일구조를 둘러보았는데 불행하게도 이 게임은 다국어화를 고려하지 않은 형태로 제작되었고 모든 대사들이 UI와 게임 코드내에 하드코딩 되어있는 상태였다.

게임 내의 대사 패턴들을 파악하고 Python으로 대충 대사 추출 코드를 작성해서 언제나 처럼 엑셀로 대사를 뽑았다.

대사수는 아래와 같다.

 

  • 줄수 : 1955
  • 단어수 : 21423
  • 글자수 : 92613

 

이제 대충 단어수만 봐도 번역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각이 나오는데 이정도면 텍스트가 굉장히 적은 편이고 번역만 몰두 한다면 10일컷 칠 수 있는 정도의 볼륨이었다. 이번 게임에도 Who's Lila?부터 한패에 참여해주신 이뉴앤도님께서 번역을 전담해주셨고 여러가지 표현 곤란한(?) 부분들을 정말 매끄럽게 번역해주셨다. 영알못은 감사할뿐..

하지만 번역은 해결되었으나 그 외 이미지, 동영상 같은 미디어들의 처리와 게임에 조립하는 부분, 그 외 기타등등 여러가지 장벽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다국어화 고려가 전혀 안되어 있다보니 게임볼륨은 적었지만 기술적으로는 가장 고생한 패치였던 것 같다.

한패만들때 사용한 파이썬 코드들도 다른 패치에 비해 월등히 많다. 자동화를 위한 노력들..

이런 노력끝에 번역과 기술문제는 전부 해결되었고 일단 한글대사들을 게임에 적용해보았으나...

 

즈그 멋대로 널부러져있는 슬롯과 밑줄들 ㅎㅎ...

이것들은 어쩔 수 없이 UI코드를 손보면서 한땀한땀 옮겨주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한 챕터당 위치 조절이 필요한 요소들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어서 하루에 한챕터 조정하는 식으로 어찌어찌 진행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요약문 표시할 공간이 턱없이 모자랐던 것... 모든 명사슬롯 뒤에 이(가), 을(를)이 들어가다보니 필연적으로 문장이 길어졌고 애초에 폰트 특성상 반각문자인 영문보다 전각문자인 한글이 차지하는 공간이 넓다보니 후반 스테이지 가면 거의 대부분의 요약문이 표시공간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문장 줄여보겠다고 몸을 비틀어 보았으나 위의 스크린샷처럼 문장조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볼륨들은 어쩔 수 없이 폰트크기를 조정해서 넣을 수 밖에 없었다. 폰트크기를 조절해버리면 슬롯의 위아래 간격까지 모조리 틀어져 버리기에 이중수고를 해야해서 정말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눈물을 머금고 작업했다 ㅜ..

 

뒤늦게, 분해한 파일들을 고도엔진에 역으로 넣어서 UI 상에서 슬롯 위치를 조절할 수 있다는 걸 알아냈는데 이미 늦어버렸다... 근데 그것도 뭔가 번거로워서 결국은 걍 한땀한땀 손으로 했을듯? ㅎㅎ;

 

번역 이모저모

 

번역에 관련된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아무래도 문법의 차이때문에 얻어낸 단어슬롯을 자연스럽게 문장에 녹여내기 힘든 부분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원문 : Early in the morning, James Turner drugged Leopold Blanchard in the library and stole a button.

번역문 : 이른 아침, 서재에서 제임스 터너레오폴드 블랜차드약에 취하게 했고 단추도둑질했다.

 

drugged를 [중독시켰]고, 같은 형태로 표현도 가능했지만 이렇게 하면 다른 동사들도 [자극 했] [훔쳤]으로 바꿔야하기 때문에 모양새가 이쁘지 않았다..

따라서 ~했고 와 같은 형태로 표현하기위해 동사들은 명사로 표기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아마 대부분의 동사 단서들이 이런식으로 되어 있을 것인데 뻥뚫린 문장을 보았을때 이편이 좀 더 직관적으로 내용을 파악하기 쉽기때문에 잘 한 결정이었던것 같다.


"어둠의 손 수행자가 물질 사용하여 대상을 박멸하도록 지시"

그리고 또 하나 애먹었던 비밀 지시문...

이거 뭐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번역자님께서 원문을 매끄럽게 번역을 해주셔서 거기에서 문장을 좀 더 다듬어서 완성했다.

네번째 문장에서 "물질"은 "물질을"로 바꿔보고 싶었는데 문장이 안떠올라 걍 둬버렸다.. 작문고자...ㅎㅎ

한패 배포후 스트리밍을 모니터링 했을때 이 지시문을 가리키는 힌트인 "각 열에서 네 번째 것을 취하라" 라는 쪽지에서, 의외로 네 번째 것이라는게 단어가 아닌 글자라고 이해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옳은 방향으로 추리를 했음에도 각 행의 네 번째 글자를 읽어서 "엥?이게뭐지?" 하는 리액션들을 봤는데 번역이 문제일까 싶어서 원문을 보았더니 원문도 그냥 "Thing"이라고 되어있어서 아마 의도적인 부분이라보고 그냥 두었다. 


네 번째 덕목 "정직"

 

그리고 또 하나 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던 질서당의 네 번째 덕목인 "정직"의 처벌요소들.

왜 여기에 "문학"이 포함되어 있는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사람이 많았다. "소설"을 잘못번역 한 것이 아니냐라는 의견이 많았는데 실제 원문도 "Literature"으로 오역은 아니다.

사실 나도 처음 보았을 때 이해가 잘 가지 않았는데 추측하기로는 문학에는 사람들의 경험이나 지식, 사상 같은 것들이 포함될 수 있기에 국민들이 너무 똑똑해지고 자유의지를 가지게 되는 것을 우려해 우민화 정책을 펼치기 위해 포함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황금 우상 사건의 공식 디스코드에도 질문을 남겨보았는데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참고로 공식 디스코드에서는 유저끼리 서로 스토리를 분석하기도 하고 가끔 개발자가 등판해서 답변을 해주기도 하니 게임내에서 궁금한 부분이 있었다면 질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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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차이로 인한 추리의 어려움

 

최대한  추리에 무리가 없도록 번역에 신경을 쓰긴했지만 아무래도 국내 플레이어들은 게임의 시대나 배경, 문화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기때문에 이런 부분은 번역으로 커버를 할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너무 많은 이름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가장 흔히 있었던 어려움은 "성"과 "이름"의 구분이다. 영미권 사람이라면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성과 단어를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헷갈린다 하더라도 인물간의 관계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또한 영미권에서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는 점도 대부분 상식으로 알고는 있지만 막상 사건만 놓고 생각을 하다보면 쉽게 간과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제1장 3챕터에서 로즈 큐버트의 신원을 추측할 때 대부분 여자가 한 명이라는 점이나 소거법을 이용해서 추리를 했을텐데 사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유언장에 있다.

상속자 중에 식민지에서 생활한 인물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소지품을 조사해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로즈 큐버트의 소지품

로즈 큐버트가 가진 이국적인 제목의 책이나 부채 등의 소지품을 보면 해외에서 생활을 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이거나 저거나 어차피 다 외국어라서 쉽게 알아채기 힘든 점 같다. 

 

끝으로

 

 

한패 제작 기간은 한 달 정도로 딱 끊었다. 실제로는 더 일찍 끝났으나 한글버전으로 자연스럽게 추리가 가능할지 테스트 플레이에 신경을 쏟다보니 1차 작업완료로부터 10일정도 더 걸린듯하다. 퀄리티를 높히기 위해서라면 한도 끝도 없이 손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완성도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시간을 질질 끌다가 기운이 빠져버리는 것 보다는 어느정도 퀄리티 선에서 타협을 보고 배포해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은 것 같다.

 

예상했던 것처럼 배포 후 플레이어들의 감상은 굉장히 긍정적이었고 내가 게임 제작자는 아니지만 열심히 작업한 작업물을 재미있게 플레이해주니 뿌듯함을 느꼈다.

이런류의 추리게임이 더 나와주면 좋겠지만... 장르의 특성상 스토리와 개연성이 굉장히 중요하고 또 이 부분을 잘 해낼 수 있는 역량있는 게임사가 좀 부족한 것 같다. 혹은 돈이 되지 않으니 뛰어들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추리게임의 단점은 플레이할때는 정말 재미있지만 2회차 3회차가 불가능하니 단발성 재미로 끝난다는 점인데 그렇다고 추리 볼륨을 너무 늘려버리면 유저입장에서는 피로감을 느끼고, 또 플레이 타임을 억지로 늘리기 위해 난이도를 높이는 것도 여러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니 항상 딜레마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황금 우상 사건은 황금밸런스가 딱 맞추어진 게임이 아닐까 싶다.

아마 이정도 퀄리티의 추리게임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나오는 걸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기다린다... 다음 추리갓겜을...